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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악마와 계약한 사나이

웹소설 > 일반연재 > 공포·미스테리, 퓨전

키노91
작품등록일 :
2018.09.17 02:58
최근연재일 :
2018.11.17 07:05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15,462
추천수 :
331
글자수 :
305,896

작성
18.09.24 06:00
조회
402
추천
6
글자
14쪽

루시퍼(Lucifer)(6)

DUMMY

희찬은 천천히 눈을 떴다.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일어나서 주변을 둘러보니 바로 한정그룹 건물 옥상이었다. 희찬은 뛰어내리기 전의 위치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누웠던 곳 바로 옆에 짐이 담겨있는 박스도 놓여 있었다. 무엇 하나 바뀐 것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루시퍼와 나눴던 대화조차도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꿈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뛰어내렸던 것도, 루시퍼와 만난 것도.

희찬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루시퍼는 하루라는 시간을 주었다. 아직 시계는 오후 3시를 채 넘지 않은 시간이었다. 희찬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엉덩이를 털고 옷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희찬은 다시 난간으로 다가갔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머리카락과 넬타이가 날렸다. 갑자기 갑갑함을 느껴 희찬은 넥타이를 벗어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난간 아래로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자신이 조금 전 이 아래로 뛰어내렸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다시 뛰어내리라 한다면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왠지 루시퍼가 말한 내일까지는 기다려보고 싶었다.

희찬이 난간에서 멀어졌다. 그러다 발에 물건이 걸렸다. 바로 희찬이 놓아두었던 박스였다. 희찬은 박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안에 들어있는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집에 가져간다 해도 별로 쓸모없는 물건들이 대부분이었다. 희찬은 물건 중에서 악마의 문화사 책 한 권만 집어 들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옥상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희찬이 멍하니 서서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지켜봤다. 그것은 연정과 이우현 부장이었다.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희찬은 속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조금 전에 그들은 옥상에 올라왔었다. 그런데 다시 또 올라온 것이다. 희찬은 들키지 않으려고 다시 몸을 숨겼다.

연정과 이우현 부장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입술을 포갰다. 이 장면 또한 희찬이 분명 보았던 장면이었다. 희찬은 문득 자신이 옥상에서 뛰어내리기 바로 전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서 조금 더 전으로 오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연정과 이우현 부장의 키스는 희찬이 숨어서 지켜보는 가운데 깊고 길게 이어졌다. 이부장의 손이 자연스럽게 연정의 엉덩이와 허리, 그리고 가슴으로 더듬어 올라갔고, 연정은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키스가 이어지더니 잠시 두 사람은 떨어졌다. 숨을 헐떡일 정도로 열정적인 키스였다. 그리고는 두 사람은 서둘러 옥상에서 벗어났다. 분명 희찬이 한 번 봤던 장면이 확실했다.

이것이 루시퍼의 장난일 수도 있다고 희찬은 생각했다. 루시퍼가 제안한 계약을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한 장치 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라고 생각했다.

희찬은 약간 기다렸다가 옥상을 벗어나는 문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을 시간을 계산해 기다린 것이다. 자신의 짐이 들어 있는 박스는 그대로 둔 채 책만 한 권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옥상애서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 비상계단에 들어섰다. 그러자 사무실로 내려갔을 거라고 생각했던 연정과 이우현 부장이 아직 그곳에 있었다. 두 사람은 계단에 선채 뜨거운 키스를 나누다가 옥상에서 갑자기 희찬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깜짝 놀라며 떨어졌다.

“어..... 어떻게..... 거기서.......”

이우현 부장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희찬을 보며 물었다.

“희찬씨! 옥상에 있었어요?”

연정도 물었다. 하지만 희찬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두 사람에게도 이제 오만 정이 다 떨어진 희찬이었다. 희찬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손에 책을 든 채 묵묵히 두 사람 앞을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아니 사람이 물었으면 대답을 해야......”

이우현 부장이 지나가는 희찬에게 뭐라 하려했다. 하지만 연정이 이우현 부장의 팔을 잡아 제지시켰다. 연정은 왠지 희찬에게 말을 걸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를 느꼈던 것이다. 내심 희찬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우현 부장이 뭐라고 한 마디만 더 했다간 그대로 주먹을 날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연정이 막은 것이다.

희찬은 계단을 내려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고개만 돌리면 뒤쪽 계단 위에 서 있는 연정과 이우현 부장을 볼 수 있었다. 아래층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희찬은 멍하니 선 채 옆구리에 책을 끼고 묵묵히 기다렸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간 희찬이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누른 채 서 있었다.

“안 내려갑니까?”

잠시 기다리던 희찬이 물었다.

“아. 이따가...... 먼저 내려가.”

이부장 대신 연정이 대답했다. 희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정아...... 정규직 된 거 축하해.”

희찬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열림 버튼에서 손을 떼었다. 문이 스르륵 닫혔다. 연정이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엘리베이터의 문은 닫혔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연정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희찬은 마지막 연정의 말이 궁금하긴 했지만 호기심 이상은 아니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면서 몇 번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타려했다. 하지만 희찬이 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어느 누구도 타려하지 않았다. 그렇게 희찬은 엘리베이터를 혼자서 타고 1층까지 편하게 내려올 수 있었다. 괜히 위로한답시고 몇 마디 건네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로비를 지나 경비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한 후 건물을 나섰다. 경비는 그래도 희찬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희찬을 알고 있어서 받아준 것인지, 아니면 누군지 몰라 그냥 인사를 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건물을 나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한때 자신이 몸 담았던 건물이었다. 위에서 바라보는 것 보다 더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건물이었다. 이 안에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서 바삐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 안에는 협잡과 음모, 배신과 거짓말도 난무할 것이다. 자신은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려는 시도도 있을 것이다. 열심히 일만 하면 성공할 것이라는 생각은 그야말로 순진한 착각에 불과했다.

희찬은 생각했다. 자신에게는 24시간이 있었다. 그 24시간 동안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내야 했다. 루시퍼를 다시 만날 그때까지가 자신의 생명을 결정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기인 것이다. 희찬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세상이 자신을 버린다면 자신이 세상을 향해 주먹을 날려주겠다고 다짐했다. 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물러서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끝까지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이젠 무기를 선택할 시간이었다. 희찬은 한정그룹을 뒤로 하고 걸어갔다. 싸울 준비를 하기 위해서.



희찬이 집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날이 어두워진 이후였다. 곧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한 낮의 한가함을 즐겨보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제대로 즐겨본 적이 없는 평일의 오후였다. 언제나 일을 하고 있거나 공부를 하고 있던 시간이었다.

남들이 이상하게 보든 말든 그냥 걸었다. 한강변 공원을 걷기도 하고,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입에 물고는 걷기도 했다. 괜히 관심도 없는 누군가의 전시회를 기웃거리기도 했고, 혼자 카페에 앉아 커피를 홀짝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한 낮의 오후를 만끽하고 어둑어둑해지자 집으로 향했다.

희찬의 집은 낡은 2층집의 옥상에 만들어진 옥탑방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옥상으로 올라가는 외부 철제 계단이 있었다. 아무리 조용하게 올라가려 해도 구두소리가 심하게 들리는 계단이었다. 비라도 오면 빗물 떨어지는 소리에 잠을 자기 힘들 정도로 시끄럽기도 했다.

희찬은 계단을 올라갔다. 철제 계단의 덜컹거리는 소리와 삐걱거림이 묘하게 신경을 자극했다.

옥상에 올라가자 누군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바로 집주인 아주머니였다. 까탈스럽고 깐깐한 아주머니여서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왜 이제 와?”

주인 아주머니가 역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희찬에게 한마디 했다. 회사에서 잘린 힘겨운 하루였는데 듣기 싫은 목소리를 들으니 희찬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왜요? 제가 일찍 와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희찬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뭐 그건 됐고, 저기...... 방을 좀 빼줘야 겠는디?”

희찬은 주인 아주머니의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황당했다.

“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직 계약 기간이 9개월이나 남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방을 빼라뇨?”

“뭐, 일이 그렇게 됐네. 그러니까 빼. 한 달 줄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렇겐 못합니다. 이유가 뭡니까?”

주인아주머니의 억지에 희찬이 화가나 따지고 들었다.

“이유? 몰라서 물어?”

“네. 모릅니다. 제가 월세를 밀렸습니까? 아니면 시끄럽게 했습니까?”

“사고를 쳤잖아? 온통 뉴스에서 떠들고 있는데 그걸 몰라?”

희찬은 황당했다. 뉴스에 등장하기만 하면 죄가 있고 없고는 관심도 없었다. 아니 뉴스에 등장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엄청난 죄를 지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게 방을 빼라는 이유가 됩니까? 이거 엄연히 불법입니다.”

희찬은 속에서 한바탕 욕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말했다.

“법? 총각이 법을 얘기해? 법을 그렇게 잘 알아서 그런 나쁜 짓을 했어?”

주인 아주머니도 지지 않고 희찬에게 독설을 날렸다.

“제가 무슨 나쁜 짓을 했는데요?”

희찬이 씩씩거리며 물었다.

“그건 모르겠고 뉴스에 나왔잖아! 그럼 나쁜 짓 한 거지. 뉴스에 나온 놈들은 다 나쁜 짓 한 놈들이잖아! 안 그래?”

주인 아주머니의 막무가내에 희찬은 기가 막혔다. 이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왜 자신이 계속 듣고 있어야 하는지 점점 답답해졌다.

“그럼 뉴스에 대통령 나오면 나쁜 짓 해서 나온 거네요.”

“그, 그건 아니지.”

희찬의 말에 주인아주머니는 약간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억지를 굽힐 생각은 없는 듯 했다.

“어쨌든 전 못나갑니다.”

희찬은 주인아주머니를 지나쳐 잠겨있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문을 세게 닫고는 안에서 잠가버렸다. 밖에서는 여전히 주인아주머니가 동네가 떠나갈 듯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었다. 대부분이 희찬에 대한 욕이었다.

방으로 들어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도 옥상에서 주인 아주머니는 계속 욕지거리를 해댔다. 정말 지치지도 않는 체력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옥상이 조용해졌다. 살짝 창문을 열어보니 주인 아주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본인도 지쳤는지 옥상을 내려간 것 같았다.

희찬은 창문을 닫고 깔아 놓았던 이불에 벌러덩 누웠다. 시계를 보니 저녁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생각해 보니 아무것도 먹지 않아 배가 고팠다. 하지만 입맛이 없어 아무것도 먹기 싫었다. 그렇게 누워서 잠이 들기를 기다렸다. 잠이 막 들려는 순간 전화벨 소리가 희찬의 잠을 방해하며 울렸다.

휴대폰의 액정을 보니 전혀 모르는 번호였다. 받을지 말지 희찬은 잠시 고민했다. 사건에 연루되고 나서 쓸데없는 곳에서 많은 전화가 왔었기 때문이었다. 주로 기자들의 연락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대답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끊어왔었다. 이번에도 기자인 것으로 생각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시끄럽게 울리던 전화벨이 끊어졌다. 하지만 같은 번호로 다시 전화가 왔다. 전화는 끈질기게 울리고 있었다.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아 희찬은 결국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희찬이 전화를 받았다.

“여기 검찰입니다. 내일 조사 받으러 나오셔야 합니다. 변호사 대동해서 오셔도 됩니다. 내일 오전 10시까지 607호 서강희 검사실로 오세요.”

상당히 사무적인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들렸다. 하지만 뜻밖이었다. 이제까지 경찰의 조사는 몇 번 받았지만 검찰의 조사는 처음이었다. 더구나 민유섭 선배의 죽음 이후 뜸했던 조사였다. 결국 사건이 검찰로 넘어간 모양이었다.

“얘기 들으셨죠?”

“네. 네.”

상대방의 사무적인 말투에 얼떨결에 희찬이 대답을 했다. 그러자 상대방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희찬은 허탈했다. 인턴에 뽑히고, 엄청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프로젝트가 망하고, 경찰 조사를 받고, 회사에서 잘리고, 이제는 검찰 조사까지 받게 된 것이다. 정말 파란만장하고 스펙터클한 인생이었다. 고작 서른밖에 안 된 나이에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억울한 감정이 밀려오면서 세상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희찬은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고는 소리 내어 울었다. 처절하게 울었다. 어릴 적 아버지의 자살한 시신을 발견한 이후 울지 않았던 그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울지 않았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우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까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이불이 들썩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희찬이 천천히 이불을 걷었다. 눈물도 멈췄고, 울음도 그쳤다. 그대로 잠을 청하기 위해 이불 위에 벌렁 누워버렸다.

검사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검사의 무시무시한 질문에 대답을 잘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미처 생각 못했지만 검사의 이름을 들었을 때 왠지 모르게 귀에 익숙했다. 그냥 비슷한 이름이겠거니 생각했다. 어릴 적 친구가 검사가 되어 자신의 앞에 나타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우연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희찬은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일어나는 우연은 오로지 모든 것이 안 좋게 만들어지는 우연들뿐이었다. 희찬은 어릴 적의 친구가 지금 성장한 모습이라면 어떻게 변했을까 상상하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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